Based in Seoul

CURATED
GLOVE BOX Younghae Chang • DINOSAVR Yesul Kim, Rémi Lambert • ANGELIC BUSTER Seungmann Park • POWDER CHAMBRE Naeun Oh, Ezi Woo • NEW HERMITS 99betaHUD, dpgp78, Jipyeong Kim, Hyunjin Kim, Hwan Lee • IMAGE ALBUM Minhee Kim

CO-CURATED
MODS: RULE BOOK Elly Yoo, Joohye Moon, Rim Park, Jaein Jung • NO TRACE Hyojae Kim • MODS Hyojae Kim, Yesul Kim, Joohye Moon • LIQUID TOMUSON Chaehee Shin • X'S MOUNTAIN Minhee Kim, Mubyungjangsu, Hyunwook Joo

The Body is a Podium, a Bed, and a Coffin for "I"
Sein Kim

A wisdom tooth is pulled out at the dentist. With only your nociception blocked, you can feel the mass of your skull being pulled together by the extraction tool in your mouth. At the neuropsychiatric clinic, you're prescribed medication for mental hygiene. The two "I's" that begin to diverge after taking the medication alternately die and come back to life, fundamentally unable to understand each other. A deadly infectious disease confines you to your home. Private spaces overlap with quarantine centers that are subject to the public healthcare network, and everyone spends years where their bed is indistinguishable from a hospital bed, sometimes even from a coffin.

Chang has developed a work about physical contact that oscillates us between the belief of "I" and the perception that "my body is not mine". While her last solo exhibition focused on the compulsive rhythms of sexuality and the emotional momentum it generates, this second solo exhibition foregrounds the kind of mediation that always accompanies that dimension of momentum. What is mobilized as a metaphor for that mediation and the objectification that it performs is the visuality of the "glove box," a container with built-in gloves to control the quarantine, and the touch of medical control it implies.

Under the paranoid structure of observation, which can be symbolized by the glove box, and the inevitable hierarchy of controllers and controlled, symptoms are artificially suppressed, affected parts are removed from the body if necessary, and in some cases, the body's very continuation of life is interrupted. These are the big and small deaths that medical control omnipresent on many levels of the body in the name of life. These deaths are perhaps the most everyday illustrations of the sobering truth that we cannot immediately identify our bodies as "I". However, Chang leaves behind the overly refreshing irony that subjectivity is only possible as an excription of the body that is open to the outside world, and instead commemorates the deaths in all their meanings by stoically depicting the sensation when the body, which is part of the "I", is subsumed as a material object in the functional dimension of the "clinical".

There are immovable lumps that feel like they have been squeezed or cut, like the residue of a foreign sense of control carving away at the "I". The load and sharpness of the objectivity imposed on them seems to keep increasing, with the prolonged panting of the CPR count and the coldness of the X-ray images that cross the screen as if simultaneously alienating the audience and the characters. The identity equation established here between the viewer and the exhibition is also open to the deaths in the viewer's own body, and standing and being projected here are corpora that, like a podium, support the "I," yet are repelled by the "I". They are both our bodies under medical control and the corpses of momentary sensations that have been fried or shriveled in the mediated experience. In the white cube, a space as bleached as a hospital, we hope the viewer will be able to diagnose the cause of death of these bodies in their own way. In some places, diagnosis is indistinguishable from mourning.

몸은 '나'를 위한 단상이자 침대, 그리고 관
김세인

치과에서 사랑니를 뽑는다. 통각만이 차단된 상태로 입 안 발치 도구에 집힌 생니가 완강해, 함께 당겨지는 두개골의 질량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신경정신과에서 정신 위생을 위한 약을 처방 받는다. 복용을 기점으로 갈리는 두 '나'는 서로를 근본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면서 교대로 죽었다가 살아나기를 거듭한다. 치명적인 감염성 질환으로 집에 갇힌다. 사적인 공간이 공적인 의료망에 예속된 격리소와 중첩되고, 모두는 '나'의 침대가 병원의 침대와 구분되지 않는, 때로는 관과도 구분되지 않는 몇 년을 보내야만 한다.

장영해는 '나'라는 믿음과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는' 지각 사이에서 우리를 진동시키는 접촉에 관한 작업들을 전개해왔다. 지난 개인전이 섹슈얼리티의 관습이나 규칙에 따른 강박적 리듬과 그로 인한 감정적 운동성에 주목했다면, 이번 두 번째 개인전은 그런 운동성의 차원이 언제나 수반하는 모종의 매개를 전경화한다. 그 매개와 그로써 수행되는 사물화/대상화의 메타포로 동원되는 것은 격리체를 통제할 수 있도록 장갑을 내장한 컨테이너인 '글러브 박스(glove box)'의 시각성과 그것이 함축하는 의학적 통제의 손길이다.

글러브 박스로 도해될 수 있는 편집증적 관측 구조, 그리고 통제자와 통제 대상의 불가피한 위계 하에서, 증상은 인위적으로 억제되고 필요하다면 환부가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며 경우에 따라서는 몸의 연명 자체가 중단되기도 한다. 그것은 의학적 통제가 삶이라는 명목으로 몸의 여러 층위에 편재시키는 크고 작은 죽음들이다. 그 죽음들은 우리가 자신의 몸을 즉물적으로 '나'와 동일시할 수 없다는 새삼스러운 진실의 가장 일상화된 예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영해는 그렇게 속절없이 외부를 향해 열린 몸에 대한 기탈(excription)로써 비로소 주체가 가능해진다는 식의 지나치게 산뜻한 아이러니는 일단 뒤로 물린 채, 대신 '나'의 일부인 몸이 '임상'이라는 직능적 차원에 물질적 대상으로 포섭되었을 때의 감각을 담담히 형상화함으로써 거기서 불거지는 모든 의미의 죽음들을 기리고자 한다.

통제의 이물적 감각이 '나'를 깎아내고 들어내며 발생한 찌꺼기가 압착되거나 재단된 듯한 부동의 덩어리들이 있다. 거기에 가해지는 객관성의 하중과 날카로움이, CPR 카운트의 장황한 헐떡임으로, 그리고 관객과 등장인물을 동시에 소격시키듯 스크린을 가로지르는 X선 투과 이미지의 냉담함으로 계속 더해지는 것만 같다. 여기서 관객과 전시 사이에 성립하는 항등식은 관객의 몸 안에 유폐된 죽음들을 향해서도 열려 있는데, 이곳에 기립해 있고 상영되고 있는 것은 마치 단상처럼 '나'를 떠받치고 있으면서도 '나'와 격절되는 몸체(corpus)들이며, 그 몸체들이란 의학적 통제 하의 우리 몸뚱이이자 그로써 매개되는 경험 속에서 튀겨지거나 쪼그라들었던 순간적 감각의 시체들이기도 하다. 병원만큼이나 표백된 공간인 화이트큐브에서, 관객들이 그 시체들의 사인을 각자의 방식으로 진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떤 곳에서 진단은 애도와 구분되지 않는다.

The True Art of the Dinosaur
Sein Kim

What is the true art of the dinosaur? The dinosaur is but an image of our fossilized backward projection, predating humanity, perpetuated by an imagination as large as their presumed size. Just as the Chinese character gong (恐) in the Korean word "dinosaur" means "fearful" but also "perhaps" or "speculatively," the image of the dinosaur must be painted with the inevitable barrenness of factuality. And that limitation can't be overcome by going back in time, because we simply did not exist back then.

Therefore, true dinosaur art must be created by the absence of dinosaurs, not their presence. "The true sound of the dinosaur" is the subtitle of a subreddit dedicated to dinosynth, a musical movement derived from black metal. Of course, no one knows what a dinosaur actually sounded like. But what we are trying to approach here is that the "true sound of the dinosaur" which almost naively substitutes black metal's heretical object of adoration by "dinosaurs," is an aesthetic worship that is only possible through a radical break from the past.

And ultimately, true dinosaur art should be motivating the premonition that the viewer himself or herself will one day remain to someone in the future as an absolute negative, an absence that not even loss could produce. Because the future is not something that lies ahead of us, but something that may arrive unexpectedly like a meteorite and completely overwrite our present. And the future will inevitably leave us unable to fully remember the present. True dinosaur art is art that can encompass past, present, and future all at once for that very purpose.

An example of this is the exhibition 𝔇𝔦𝔫𝔬𝔰𝔞𝔳𝔯 by Yesul Kim and Rémi Lambert. 𝔇𝔦𝔫𝔬𝔰𝔞𝔳𝔯 theatrically presents a worldview in which the days of the dinosaurs and our childhoods are synchronously superimposed, and their existence remains in the past in the form of a kind of imaginary documentary or pseudo-artifact. A deeper look reveals that the dinosaurs and children in this exhibition do not simply coexist in the same world, but are recursively intertwined, each becoming a metaphor for the other. In other words, they are not just present together, they are absent together.

In the intuitive belief that our present is an extension of our childhood, many past children are objectified by the thought of an "old self". But adults cannot fully recognize their past as children any more than children can fully recognize their future as adults. When the person you used to be, and the things you used to like or dislike, the people you used to play with or fight with, the things you used to long for or fear and imagine existed, the person you are now did not. True dinosaur art must be the art of the fossil, suggestive of all such things, where absence precedes loss.

진정한 공룡의 예술
김세인

진정한 공룡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공룡은 화석에 의지한 우리의 후방 투사가 빚어낸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며, 그 이미지는 자신이 지시하는, 인류 이전에 사라져버린 그들의 추정된 몸집 만큼이나 커다란 상상에 의지해 지속되어왔다. '공룡'의 '공(恐)'이 '두렵다'를 뜻하는 동시에 '아마도'나 '추측하자면'을 뜻하기도 하듯, 공룡의 이미지는 사실성의 불가피한 불모를 떠안은 채 그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한계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더라도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룡이 존재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공룡의 예술이란 공룡의 존재가 아니라 공룡의 부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어야 한다. 블랙 메탈에서 파생된 음악적 흐름인 다이노신스(Dinosynth)를 다루는 서브레딧의 소개말은 '진정한 공룡의 소리(The true sound of the dinosaur)'다. 물론 공룡의 소리가 실제로 어땠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해두고 싶은 것은, 블랙 메탈의 이단적 숭배 대상을 '공룡'으로 거의 천진하게 대치해놓은 그 '진정한 공룡의 소리'가, 어떤 과거와의 단절과 낙차로만 가능한 미적 섬김이라는 점이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진정한 공룡의 예술이란 언젠가 감상자 자신도 미래의 누군가에게 공룡과 같은 절대적 부재, 상실조차 성립할 수 없었던 그런 부재로 남으리라는 예감의 동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미래란 저 앞에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운석처럼 불시에 떨어져 우리의 현재를 완전히 덮어씌우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며, 미래란 필연적으로 현재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룡의 예술은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꺼번에 파지할 수 있는 예술이다.

일례로 여기에 김예슬과 헤미 랑베흐의 《Dinosavr》가 있다. 이 전시는 공룡의 시절과 우리의 유년 시절이 공시적으로 중첩된 세계관을 연극적으로 제시하는데, 일종의 상상적 기록화 또는 의사적 유물이라는 포맷의 차원에서 파악하자면 그들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과거에 머문다. 더 면밀히 보자면 이 전시에서 공룡과 아이들은 단순히 한 세계에 공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유비가 됨으로써 순환적으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부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재는 어린 시절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직관적인 믿음 속에서 과거의 많은 아이들이 '예전의 나'라는 말로 대상화되곤 하지만, 아이가 어른으로서의 미래를 완전히 인식할 수 없는 것 이상으로 어른도 아이로서의 과거를 완전히 인식할 수 없다. 예전의 나 자체, 그리고 예전의 내가 좋아했거나 싫어했고 같이 놀았거나 싸웠고 동경하거나 두려워하며 상상했던 것들이 존재할 때,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진정한 공룡의 예술이란, 상실보다 부재가 앞선 그런 모든 것들을 암시하는 화석의 예술이어야 한다.

 

쌀먹충 게이머-사진가의 태도에 관하여
김세인

우리는 이제 이미지에 얽힌 진실을 그 생산자나 재현 대상보다는 데이터를 통해 좇는 것이 더 익숙해졌다. 그런데 이미지가 언제나 데이터와 연결되어 있을수록, 어떤 이미지 산출물이 실재적인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믿음은 더 강하게 요청되는 셈이다. 그 믿음은 특히나 가상에의 몰입을 위한 필수적 소양이며, 당연하지만 그것은 게이머의 멘탈리티에 가장 전형적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게임을 '인게임 노동'이라는, 그 바깥의 현실과 분간하기 어려운 지평으로 치닫게 하는 것은 게임 속 아이템이 주는 힘일 때가 많다. 일종의 재화로서의 아이템이란 그것을 획득한 누군가에게는 황홀할 정도로 게임 속 세계와의 구체적 장력을 실감케 하며, 현실보다 훨씬 확연하면서도 컴팩트한 이해득실을 의미하는 데이터인 것이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물신적 대상으로 구획하고 표상하는 것은 바로 개개의 아이템에 할당되는 이미지 파일이다.

박승만은 스스로가 〈메이플 스토리〉와 〈디아블로 II〉를 거친 온라인 RPG 게이머이자, 거기서 이른바 '쌀먹충*'이라는 경멸의 대상이기도 했다. 전시 제목이 된 '엔젤릭 버스터'는 메이플 스토리에서 P2E(Play to Earn)에 최적화된 직업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으로, 그렇듯 이번 전시는 인게임 노동 경험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박승만은 그것에 대한 섣부른 가치 판단이나 비판적 접근은 유보한 채 어디까지나 게이머-사진가 당사자의 입장에서 아이템의 존재 방식과 그 매혹을 둘러싼 게임적 현실을 사진전의 포맷에 솔직하게 재배치해본다. 복사가 금지된 아이템과 에디션 제한이 걸린 사진 작품이 닮았다는 것은 기본이다.

우선 〈사냥, 채굴, 노동의 이펙트〉는 메이플 스토리에서의 노동의 근거인, 스킬의 히트 이펙트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화면에 다중 노출시킨 사진이다. 전시에서 유일하게 아날로그 촬영에 의지해 제작된 작품이면서도, 여기서 필름은 이미지를 현상해내기 위한 중성적 장이 아니라 그 입자를 스프라이트에 노출된 픽셀과 함께 시각적 요소로서 등치시키기 위한 재료가 된다. 히트 이펙트의 광휘와 동기화된 카메라 조작으로써, 박승만은 사진을 통한 자신의 이미지 제작 프로세스 자체를 게임에서의 반복 플레이를 통한 재화 창출의 유비 또는 의사적 등가물로서 가시화한다.

그 반복 플레이는 엔젤릭 버스터를 코스프레한 실제 인물을 거리에 따라 단계적으로 촬영해 동일 사이즈로 출력한 연작, 그리고 2000년대 디아블로 II의 소박한 포토리얼리즘이 동원했던 프리렌더드(pre-rendered) 2D 이미지의 부자연스런 매끈함을 재현한 '팔라딘의 인벤토리' 연작에서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박승만의 작업에서는 디테일 레벨의 축소와 증대의 축을 계층적 세로축이 아니라 상대화된 가로축으로 전제하는 태도가 두드러지며, 우리가 편의상 '실제'와 '가상'이라 부르는 양 끝과 그 사이 점들이 이루는 각각의 거리가 일종의 식별번호와 같은 무엇이 될 뿐인 세계관을 제안하는 것이다. '팔라딘의 인벤토리' 연작이 게임의 이미지 파일을 코스프레하는 사진에 다름 아닐지라도, 그 인형 놀이를 수행하는 누군가의 충일감을 누가 무엇으로 박탈할 것인가. 박승만은 이 모든 것이 그저 갖고 싶었을 뿐이다.

* '아이템 팔아서 쌀 사먹는다'는 뜻의, 생계형 게이머를 비하하기 위한 속어.
To Customers
Kim Sein

Welcome, the name of this place is a combination of the Instagram accounts of Woo Ezi (powder) and Oh Naeun (oliochambre) use for "the job". At the same time, "powder" evokes the lightness and medium-dimensional fluidity of the images they create, and "chambre" points to the realm of "the job" in an expanded sense, or perhaps a self-fulfilling context for setting up "the job" and "not the job" as a continuum.

Dijon-trained and Seoul-based Oh Naeun's pastel paintings seems to be transformations of images that were once flashes, arranged on a single screen. Her flashes are linear semi-abstractions of the formal beauty or subtle scent of objects such as soaps, vases, and wallet cases, and they are sensory fragments that are shaped with an acknowledgement of the void of meaning; they are close to something that can only be activated as meaning in the intimate sentences of each person who inscribes them. Oh Naeun shows a synthesis of the flashes through pastel paintings, which are the result of filtering involuntary memories, and are also paintings for restoration of private and poetic meanings closed to the outside world.

Seoul-trained and Tokyo-based Woo Ezi's knitted works and resin objects are the result of a self-referential extension of the intra-active process mediated by flashes. Her fragile and fleeting flashes are improvisations in response to bodily variables deemed "imperfections," such as freckles, wrinkles, and stretch marks, that morph into something that sprouted from the skin, and she uses the finished work as a kind of flash again, a medium for her knitting and resin work. It's about continuing the chain of improvisations that began on the body, perpetuating the moment of "meeting" and "touching" as one never-ending moment.

Imagine two people who make their living permeating images into someone's skin while playing the same music that's playing in the next room. They are paid to decorate other people's bodies, at prearranged times, for set hours, with a keen sense of professional efficiency. It's a way for them to conform and surrender themselves as art majors to the realistic order of this world they love and hate, but it's also a way for them to materialize moments of beauty that have been condensed, without the thickness of meaning in their daily lives, into the bodies of others. Like this room, which will soon be gone, the body is ultimately a moment, and their flashes are only used once. Everything here sprouted from their respective rooms.

손님에게
김세인

오셨군요. 이곳의 이름은 우이지(powder)와 오나은(oliochambre)이 '그 일'을 위해 쓰는 명의를 조합해 지어졌습니다. 그러면서 '가루'는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미지 특유의 가벼운 시각성과 매체 차원의 유동성을 환기하며, '방'은 확장된 의미에서의 그 일로서의 영역, 또는 그 일과 그 일이 아닌 것을 하나의 연속체처럼 설정할 때의 자기 충족적인 문맥을 지시합니다.

프랑스 디종에서 미술을 배웠고 서울에서 일하는 오나은의 파스텔화는 도안이었던 이미지들이 변주되어 한 화면에 배열된 듯 보입니다. 그녀의 도안은 비누나 화병, 지갑 케이스와 같은 사물들의 형태미나 미묘한 향취 등이 선형적으로 반추상화된 것으로, 의미의 공백을 인정한 채 조형된 감각적 편린들이자, 새기는 쪽과 새겨지는 쪽 각자의 지극히 내밀한 문장 속에서만 의미로 활성화될 수 있는 단어들에 가깝습니다. 오나은은 파스텔화를 통해 그 도안들에 대한 종합(synthesis)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비자발적 기억이 정제된, 외부를 향해 닫힌 사적이고 시적인 의미의 복원을 위한 그림이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미술을 배웠고 일본 도쿄에서 일하는 우이지의 니팅과 레진 오브제는, 도안으로 매개된 간행적(intra-active) 과정 자체가 자기 지시적으로 연장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연약하고 덧없이 언제든 날아가버릴 듯한 도안은, 주근깨나 주름, 튼살 등 '불완전함'으로 간주되는 신체적 변수에 대응한 즉흥성으로써 마치 피부에서 돋아난 것처럼 변주되고, 우이지는 그 결과물을 다시 일종의 도안처럼, 니팅과 레진 작업을 위한 매개로 활용합니다. 몸에서 시작된 즉흥성의 연쇄를 이어가면서, 끝나지 않는 하나의 순간처럼 '만남'과 '접촉'의 순간을 지속시키는 것이죠.

옆방에서 들려오는 것과 같은 음악을 틀어둔 채 누군가의 살갗을 찔러 이런저런 이미지를 새겨내는 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을 떠올려보세요. 미리 약속된 시각에, 정해진 시간 동안, 직업적 능률성에 촉각을 기울여 타인의 몸을 꾸미고 보수를 받는 것. 두 사람에게 그 일은, 애증의 대상인 이 세계의 현실적 질서에 미술 전공자가 순응하고 스스로를 내맡기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지만, 거기서의 일상에서 의미의 두께 없이 응결되었던 아름다움의 순간을 타인의 몸에 그대로 물질화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머잖아 사라질 이 방처럼, 몸도 결국 하나의 순간이고, 이들의 도안은 단 한 번씩만 사용되니까요.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은 그런 두 사람 각자의 방에서 돋아났습니다.

Don't dream it.
Be it.
– The Rocky Horror Picture Show

There are some existences that tried to conceal themselves as paintings. Paintings of Ni Zan(倪瓚, 1301~1374), for instance, are regarded as successful manifestations of the literati's self-identity since the artist attempted to conceptually hide in the idealistic space represented on the plane surface, driven by a longing for seclusion. However, one theory¹ holds that a significant number of his paintings can be seen as perfunctory responses (known as painting as a response, 應酬畵) without immersing himself to meet the needs of others. Even well-known masterpieces such as The Rongxi Studio(容膝齋圖, 1372) may fall into this category.

Perhaps the overwhelming sense of silence in Ni Zan's paintings may have been possible because of that. Rather than seclusion within his paintings, the act of painting was an active refusal to abandon himself to the other side of painting. Consider how the attitude of indifference(冷淡) under the guidance of Quanzhen(the belief of Perfect Realization, 全眞敎)² was integrated into his existential reality within a situation in which he could not be free from literary oppression or war. Therefore, seclusion becomes more of a form of realistic absence that need to be embedded in real life rather than just a single image. Ni Zan's paintings, as a façade of such absence, could have been a tool to conceal himself from the entire entity under the name of the other world.

The early form of goth rock had emerged as one of the subgenres of post-punk and was also referred to as positive punk. When punk's negativity toward reality began to fade, goths became the negativity itself and they brought back the loss of the future to be inward romanticism hidden behind black clothing and heavy make-up. Since then, goth has grown ingrained in (counter) culture as one of many aesthetic practices and it is often used as a symbol of an aesthetic worldview in connection to unstable reality.

In terms of its origins, goth in this context appropriated Discordianism, a belief system that worships Eris, the goddess of discord and strife. According to this pseudo-religion, if the world is a clash between human rationality and chaos, absence and concealment are synonymous. For those who have experienced loss, distinguishing absence from concealment is painful and this fundamental inability of that distinction becomes the sole possibility and fascination. Shizuka Miura(三浦静香, ?~2010) who was the leader of the goth noise rock band Shizuka(静香) once wrote a long note grieving the victims of the 2008 Sichuan earthquake referring to them as those who departed to the other world. She took her own life two years later. If death was also a choice to hide in the other world, is it possible that she might return someday?

During the pandemic, the sense that we collectively had to take in at any level of life was strongly tied to the ambiguity between the absence and concealment. 𝕹𝖊𝖜 𝕳𝖊𝖗𝖒𝖎𝖙𝖘 juxtaposes the frames hermit and goth on the same line and illuminate a series of flat works as the façade of the seclusion as well as positive form of absence/concealment. This reverses the vacant space for thoughts and dreams, which was only possible through detachment or distance, and suggests the type of face-to-face interaction to which we have become accustomed again. Just like those vacant spaces, we all were new hermits not long ago.

Written by Kim Sein

¹ Chang, C. (2016). Ni Zan: Fact and Fiction. Art History and Visual Culture. no.17, doi:10.22835.
² Founded by Wang Chongyang(王重陽, 1112~1169), Quanzhen is one of the sects of Taoism which emphasizes a non-transcendental cultivation philosophy in the dimension of reality influenced by Buddhist teaching.

Lee Hwan
The video that illuminates the black wall with low light is an unfinished animation that was left on the iPad, and the angel in black clothes who appears to be looking out the window is the first part of a triptych that the artist has only recently begun working on. The small drawings directly represent some kind of negative feelings and are products of the time between the animation and the triptych. Lee Hwan saw these drawings as his distilled and objectified self, so he nailed them to death and had a funeral. He has finally settled into the other world.

Kim Hyunjin
If meeting someone is only possible in dreams, distinguishing between the presence and absence of their existence in this reality becomes meaningless. Kim Hyunjin employs a variety of shapes and decorative elements and creates a pictorial space where disconnection and encounter are entangled. They are a product of fantasy and manipulated memories that have become identical with encounters as well as belief that the depicted beings will live on their own in the void of reality.

Kim Jipyeong
Inspired by the practice of referring to the elements of hanging scrolls and folding screens as women's attire such as chima(치마, skirt) and jeogori(저고리, top), Kim Jipyeong rearranges non-visible images of women of gothic tradition on a long-winded framework. Rebecca and Bertha took reference from characters of gothic novels, while three folding screens references goth rock female vocalists, including Siouxie Sioux, the leader of the band Siouxie and the Banshees. Their flatness assimilates to the surface information value of attire, hiding in a place unknown and oscillating between their outer appearance and essence.

dpgp78(Kim Jihwan, Min Sungsig)
The curtains of dpgp78 act similar to goth makeup and cover the space in white. They turn the outside scenery into a kind of haengryeoldo(행렬도, 行列圖, painting of marching) in which the effect reflects the absence/concealment of the one who draws it, rather than the absence/concealment of the non-drawn protagonist in the haengryeoldo. Even the completed curtain can be seen as a single painting as a response made for the exhibition. However, the process of creation, where Kim Jihwan and Min Sungsig exchange their drawings without words, carried out with spontaneity and decorative considerations, can also be viewed as a play of small responses to each other's silence.

99betaHUD(Ki Yelim, Han Jihyoung)
99betaHUD allows multiple systems hidden behind reality to flow in the implicit form of iteration with the system's language. The images projected on someone's empty speech bubble are the output of a score written based on several images that Ki Yelim and Han Jihyoung extracted from the city's visuality. This new piece is a continuation of Fountantine(2022) which produced a scene where the subject as the most obvious form is transformed and subverted by artificial intelligence and visual language.

Don't dream it.
Be it.
- 록키 호러 픽쳐 쇼

그림으로써 숨으려 했던 존재들이 있다. 이를테면 예찬(倪瓚, 1301~1374)의 그림들은 은일(隱逸)에의 동경으로 평면 위에 나타낸 이상향적 공간에 관념적으로 숨기 위한, 문인의 성공적 자아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일설에 따르면¹, 그것들 중 상당수가 타인의 요구에 응하고자 자신을 불어넣지 않고 대강 그려낸 '응수화(應酬畵)'로 파악될 여지가 많으며, 심지어 〈용슬재도 容膝齋圖〉(1372)처럼 잘 알려진 걸작마저도 거기에 속할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예찬의 그림들 특유의 압도적 적막감은 오히려 그렇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그림 속에서의 은일이 아닌, 그림의 배면으로 자신을 떠나보내는 적극적 부정으로서의 그리기. 문인 탄압이나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현실에서 그가 전진교(全眞敎)²의 자장 하에 추구했던 태도인 '냉담(冷淡)'이 실존적 일상에서 어떻게 관철되었을지를 상상해보면, 은일이란 하나의 이미지보다는 리얼한 부재의 형식으로 실제 삶에 편재해야 하는 가치처럼 다가온다. 예찬의 그림은 그런 부재 자체의 파사드로써 '다른 세계'를 앞세워 그 전체로부터 스스로를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1980년대 포스트펑크의 하나로 발생한 초기 고스 록의 다른 이름은 '포지티브 펑크(positive punk)'였다. 현실에 대한 펑크의 부정성이 힘을 잃어갈 때, 고스들은 스스로 그 부정성 자체가 되어 검은 옷과 짙은 메이크업 뒤로 숨어 미래의 상실을 내향적 낭만주의의 계기로 되돌려나갔다. 이후 고스는 하나의 미학적 관행으로 지금까지의 (반)문화 전반에 용해되어, 불안정한 현실에 연동한 심미적 세계관의 기표로 호출되곤 한다.

여기서의 고스는 그 기원 측면에서 불화와 이간질의 여신 에리스(Eris)를 신봉하는 디스코디어니즘(Discordianism)을 전유하며 출발했다. 이 유사 종교가 설파하듯 세계란 인간적 합리성과 상충하는 혼돈의 장일 뿐이라면, 거기서 '부재'와 '가려짐'은 하나일 것이다. 상실을 겪은 누군가에게 부재와 가려짐의 분별이란 고통스럽고, 그 분별의 근본적 불가능성만이 유일한 가능성이자 매혹이 되기도 한다. 고스 노이즈 록 밴드 시즈카(静香)를 이끌었던 미우라 시즈카(三浦静香, ?~2010)는, 2008년 쓰촨성 대지진의 희생자들을 '다른 세계'로 떠난 이들이라 지칭해가며 애도하는 장문의 메모를 남겼다.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나 자살한 시즈카의 죽음도 '다른 세계'에 숨기 위한 선택이었다면, 언젠가 그녀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팬데믹을 거치며 우리가 삶의 어떤 층위에서든 집단적으로 체화할 수밖에 없었던 감각은 바로 그런 부재와 가려짐 사이의 애매함과도 밀접한 것들이다. 《New Hermits》는 '은자(隱者, hermit)'와 '고스'라는 두 프레임을 포개어 일련의 평면 작업을 은일의 파사드이자 부재/가려짐의 양화(positive)로 비추며, 단절이나 거리로만 가능했던 헤아림과 꿈을 위한 빈자리들을 우리가 다시 익숙해져버린 '대면'의 형식을 역이용해 제안한다. 그 빈자리들처럼,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새로운 은자들'이었다.

(김세인)

¹ 장진성, "예찬: 신화와 진실," 미술사와 시각문화 no.17 (2016), doi:10.22835.
² 도가의 한 분파인 사상 체계로, 왕중양(王重陽, 1112~1169)이 주창했으며, 선불교의 영향으로 현실 차원의 탈속적 수양론을 강조했다.

이환
검은 벽을 저조도로 밝히는 영상은 아이패드에 방치되어 있던 미완성 애니메이션이고, 밖을 내다보는 듯한 검은 옷의 천사는 이제 막 제작을 시작한 삼면화의 첫 파트다. 모종의 부정적 감응을 직설적으로 표출하는 소형 드로잉들은 애니메이션과 삼면화 사이에 놓인 시간의 산물로, 이환은 이 그림들을 증류되어 객체화된 자기 자신으로 대하며 못을 박아 직접 죽이고 애도하는 장례식을 치렀다. 그는 이제 비로소 '다른 세계'에 안착했다.

김현진
누군가와의 만남이 꿈에서만 가능하다면, 그 만남의 대상으로서 현실의 존재와 현실에 부재하는 존재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김현진은 각종 도상이나 장식적 요소를 취사 선택해 단절과 조우가 뒤얽힌 창으로서의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실제 조우와의 등가물이 된 몽상과 가공의 기억의 산물이며, 그려진 존재가 실체로서의 공백 안에서 오히려 스스로 살아가리라는 믿음의 발로이기도 하다.

김지평
족자나 병풍의 구성 요소를 '치마', '저고리' 등 여성 복식에 비유해 부르는 관습에서 착안, 김지평은 고스 전통의 비가시적 여성상을 장황의 구조에 재배치한다. 족자 두 점은 고딕 소설의 등장인물인 '레베카(Rebecca)'와 '버사(Bertha)'를, 세 폭 병풍은 고스 록 밴드 수지 앤 더 밴시스(Siouxie and the Banshees)의 '수지 수(Siouxie Sioux)'를 위시한 고스 록 여성 보컬리스트들을 참조해 만들어졌다. 이 고스들은 장황의 평면성이 표면의 정보값인 '의복'과 동화되며 불식된 어떤 영역에 숨은 채, 스스로를 외피와 실체 사이에서 진동시킨다.

dpgp78(김지환, 민성식)
공간을 흰색으로 차폐하며 고스의 메이크업처럼 작동하는 dpgp78의 커튼은 바깥 풍경을 일종의 행렬도로 바꿔치기하는데, 그와 같은 행사 그림에서 소거되는 주인공의 부재/가려짐 대신, 여기서는 그리는 쪽의 부재/가려짐이 반영된 효과가 나타난다. 완성된 이 커튼부터가 전시를 위해 납품한 하나의 '응수화'겠지만, 김지환과 민성식이 의식적인 소통 없이 각각의 드로잉을 교대로 주고받으며 즉흥성과 장식적 고려로 이루어지는 작업 과정 또한 서로의 침묵에 대해 작은 '응수'들로 진행되는 놀이라 할 수 있다.

99betaHUD(기예림, 한지형)
현실 배면에 숨은 다중적 시스템을, 99betaHUD는 시스템 언어를 빌린 재연(iteration)의 암시적 형태로 흘려보낸다. 누군가의 빈 말풍선에 투사되는 영상은 기예림과 한지형이 도시의 시각성에서 다중 이미지를 발굴하고 그것에 기반해 작성한 스코어의 산출물로, 가장 확실한 형상으로서의 주체가 인공지능과 이미지 언어 등으로 변형/전복되는 현장을 연출했던 〈Fountantine〉(2022)의 연속선상에 있는 신작이다.

 

라이너 노트
김세인

'이미지 앨범'이란 어떤 서사의 무대가 되는 세계를 표현한 음반이다. 사운드트랙이 대개 영상에 실제 삽입된 트랙들로 이루어져 서사에 견인되는 구성을 취하지만, 이미지 앨범은 상상적 공간의 음악화로서 세계-구축하기(world-building)에 가담한다. 아니메와 망가의 전성기였던 일본의 1980년대에선 이미지 앨범이 그려내는 '세계' 또한 양산될 수 있었다.

그때의 아니메나 망가 관련 음반을 이제와 유튜브로 듣는 밀레니얼에게, 어떤 의미에서 그건 모두 사운드트랙인 동시에 이미지 앨범이다. 메타데이터를 따라 과거로 동결된 특정 시점의 산물로서 '이쪽' 세계에 흐른 시간의 사운드트랙이 되거나, 아니면 원작의 서사를 건너뛰고 접한 음반이라는 차원에서 이미지 앨범이 되어 '저쪽' 세계의 존재를 환기하거나. 김민희는 전자가 유도하는 나른한 노스탤지어의 감각을 뚫고, 후자에 관련된 원본성과의 접면에 가 닿는다.

김민희는 그런 음반의 패키지를 장식한 여성 캐릭터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된 음악을 상상한다. 하나하나가 싱글이자 풀 렝스일 그 트랙들을 우린 들을 수 없다. 그 가상의 '원곡'들은 각자의 캔버스가 표징하는 우리 감각계 뒤편으로 물러나 있다. 지금 당신에게 들리는 최영의 음악은 1980년대 『디지털 트립 시리즈』¹의 포지션을 재연하면서, 들리지 않는 이미지 앨범을 어레인지한 것이란 위상에서, 공간적 사운드트랙으로서의 이미지 앨범이란 위상에서 재생되는 중이다. 그러면서 이쪽 세계의 현재와 저쪽 세계의 미래가, 캔버스 표면 '앨범 아트' 속 캐릭터의 눈에 동기화되어 맺힌다.

상정된 가상의 원곡을 위한 앨범 아트에, 김민희는 이쪽 세계의 또 다른 1980년대로부터 파급된 사이키델리아의 앨범 아트 어법을 전유한 몽경(dreamscape)의 필터를 적용한다. 배음(overtones)의 증폭, 그리고 반복 구조에 기반해 가사-서사의 특권을 노이즈로 산화시키고 사운드 박스를 하나의 순간성의 공간으로 구획했던 그 음악이, 김민희의 앨범 아트 뒤편에 가려진 내용물과 닮았기 때문이다. 김민희는 이 여성 캐릭터들의 재현적 배음이 증폭된 음악을 상상한다. 그 배음이란 당시 그들이 서사 '바깥'에서 훨씬 구체적으로 체현하고 있었을 미래고, 그런 미래를 놓고 이쪽 세계의 다른 무수한 ASUKA나 EVE들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세하게 파열시켜나가는 현실의 재귀적 반영이기도 하다. 앨범 아트로 크롭된 이미지에 가하는 김민희의 필터링은 아니메와 망가의 서사, 또 선예적 질서에 대한 의식을 배제한 촉각적인 과정이다. 그 사랑의 과정은 순간으로 응집된 몇 시간에 걸쳐 사물의 세부를 낱낱이 촉지하는 투약자의 환각을 닮았지만, 그 감각은 자기 충족적 환상이 아니며, 재활성화된 과거로서의 이미지, 또 캔버스와 우리에게 각인된 이름-제목이라는 현재적 틈이 앞으로 무엇일 수 있는지,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헤아리려 고의로 빠져든 환각에 가깝다. 어떤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 하나의 진동처럼 흐른다.

¹ 1980년대 일본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전자음악이 된 아니메 음악'을 컨셉으로 전개했던 음반 시리즈. 신시사이저가 보급되고 테크노가요(テクノ歌謡)가 주목받던 당시 상황에 힘입어 50여 장의 음반이 발매됐다.

액체 도무송
김세인

도무송. 세 음절 내내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있어야 하는 좀 귀여운 발음의 이 단어는 모양대로 떼서 붙이는 스티커를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도무송은 다이어리 꾸미기를 위한 필수템이죠. 그리고 미술러 채희씨는 사실 프로 다꾸러이기도 합니다. 사실 미술러 채희씨와 다꾸러 채희씨를 굳이 구분해야 하나 싶어요. 원하는 도무송 스티커를 직접 주문 제작할 정도로 본격적인 다꾸러 채희씨가, 그걸로도 어쩐지 만족이 안 돼서 찾는 게 결국 캔버스와 물감이라면요. '액체'와 '도무송'이란 두 단어의 조합에서 형용모순을 보긴 쉽겠지만, 도무송은 차라리 액체인 편이 좋다는 건 채희씨의 다꾸에서 필연입니다.

모든 다꾸러에겐 저마다의 다꾸 스타일과 습관이 있습니다. 다이어리에 새겨지는 내용도, 다꾸라는 행위가 그 과정과 결과로 선사하는 감정의 성격도 같을 순 없겠죠. 채희씨의 회화를 다꾸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보면, 이 회화/다꾸는 몇 줄의 이야기-기억에 꾸밈 요소가 더해진 가산적 다꾸가 아니라, 잊혀지는 사실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야기일 수 없는 순간성의 이미지로 채워진 감산적 다꾸입니다. 이야기는 그냥 명사적인 이미지들의 연쇄로 대체되고, 손글씨의 신체성은 붓놀림의 신체성으로 변환된 다꾸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해둬야 할 게 있습니다. 채희씨가 정말로 기록하고 싶은 건 이미지 객체 자체보다도 그게 기억에서 떨어져 나올 때의 신체적 실감에 훨씬 가깝다는 것, 그래서 붓 끝에 맺히는 실감은 이미지 객체를 도무송 스티커처럼 '도려내는' 감각이 번역된 모습으로서 회화면에 남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제, '도무송'의 어원이 유압 절단기 제조사 톰슨(Thompson)이란 사실을 상기해보세요.

구체적 공간의 환영성에 포치되지 않고, 플랫한 붓질과 최소한의 개별적 음영만을 가지고서 임의 배치된, 캔버스에 '발린' 도무송들. 얇게 말라붙은 채색으로 캔버스 표면의 질감이 화면상의 노이즈처럼 지글거리면서 미세하게 진동시키는 건, 단호하고도 다감한 손길로 마름질된 윤곽선입니다. '도려내기'의 논리는 또 여러모로 변주되는데, 채희씬 캔버스를 절단해 '마테'를 연상시키는 긴 화면을 병치시키는가 하면, 그나마 화훼화적이거나 정물화적인 캔버스의 경우엔 잘려나온 사진처럼 화면 바깥을 적극적으로 암시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액체도무송》은 마치 이야기를 잃고 신체 안에서 죽어가는 기억의 이케바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엔 그 재료가 된 '내 기억'에 대한 특권의식은 없습니다. 우리는 물론 채희씨조차도 붓 끝 실감의 이편과 저편 어디에서 도무송이 만들어지는가를 엄밀하겐 단정할 수 없고, 채희씨의 다이어리란 그렇게 내 몸이 끊어낸 세계, 도무송 '바깥'에 역설적인 질량을 부여하려는 수행입니다. 마지막 한숨처럼 드립핑된 물감은, 도무송들이 흘린 피처럼 보이기도, 미처 도무송이 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애도의 표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୨ৎ

아시안 퓨처리즘과 비-타자
왕신(王辛)
번역 김세인


칸코레(艦これ) 스타일의 소녀 캐릭터로 의인화된 아이오와급 전함. 『현대병기 現代兵器』의 커버를 장식하고 있는데, 이 잡지는 중국 정부의 공식 후원 간행물이다.


중국 버전 스타 트렉의 한 장면. 류는 장기 냉동 수면에서 깨어나 쪽지 하나를 발견한다. "환영하네, Law!(류의 광동 버전) 앞으로 오 년은 자네 홀로 우주선을 지켜야 해. 긴긴밤은 외로울 테지. 맛있는 별미들이 자네 영혼을 달래주길 바라네. 냉장고를 확인해보게! - 선장 리다마오(李大冒)" Law는 냉장고를 열어보지만, 그 안엔 끝없이 늘어선 만두들 뿐, 그가 싸온 광동 음식은 이미 거덜난지 오래. Law는 우주의 외로운 광동 사람이었다.
- 다구구구지(大咕咕咕鸡, 신랄하게 부조리극적인, 트롤링이면서도 도발적으로 시의적절한 밈을 만들어내는 유명 웨이보 유저), 2015년 11월.

우리 타흐리르 광장에서 또 처음 만나네. 우리 주코티 공원에서 또 처음 만나네. 우리 탁심 광장에서 또 처음 만나네.
- 라크스 미디어 컬렉티브(Raqs Media Collective)의 퍼포먼스 〈최후의 인터내셔널 The Last International〉로부터 우연히 들은, 아마도 잘못 받아적은 것일 내용, 2013년.


1. 스포일러 주의

월드 와이드 웹이 탄생한 1989년, 그해 2월에는 스페이스 오페라 『삼체 3부작 地球往事』(2006~2010)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류츠신(刘慈欣)이 데뷔 SF 소설 「중국 2185 中国2185」를 발표했다. 이 소설이 빨리 감기를 실행해 건너간 곳은 미래의 중국 사회로, 대부분이 기계적으로 연명하는 인구의 고령화 문제를 짊어지고 있다. 얼마 전 이혼과 양육권 상실을 겪은 29세 여성인 신임 최고집정관이 이제 막 취임식을 마쳤고, 그러자마자 그녀가 당면하는 일련의 해괴한 사태가 삽시간에 국가적 위기로까지 번진다. 마오(Mao)와 더불어 다섯 명의 중국인 사망자가 디지털 불멸자로 '부활'하고, 곧이어 중국의 국가 주권에 가장 중요한 영역 중 하나인 사이버스페이스를 배회하며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활'은 기술적 특이점 달성에 따른 필연적 결과로 제시되는데, 분자 홀로그래피를 이용한 첨단 3D 스캐닝이, 인간 지능 시뮬레이션에도 충분하도록 강력해진 슈퍼컴퓨터 프로그래밍과 결합하며 가능해졌다. 일상 업무의 대부분과 시민적 책임 이행의 절대 다수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이루어지긴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아날로그적 속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반면 부활자는 완전한 의식과 자율적 인간의 행위성 모두를 보전하면서도 전적으로 가상화된 실존이었던 것이다. 막대한 정보를 즉각적으로 처리하는 그들의 초인간적 역능은 디지털로 보정되는 공공 영역에 개입하고 조작을 가할 수 있는 결정적 조건이 된다. 육체를 벗어나, 그들은 진정한 불멸자이자 존재론적 유형을 달리하는 인간으로 거듭났다.

류츠신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섬뜩하리만치 예지적인 방식으로 이 포스트휴먼의 순간이 사회적, 정치적 일상을 어떻게 급속도로 집어삼키는지를 탐구해나간다. 2185년에 이르자 중국은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가 되어 있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이는 국내외의 중대사에 인구 전체가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주는 가상 인프라의 고도화 덕분이다. 류츠신은 이 인프라의 기술적 매개변수를 현재 우리가 시맨틱 웹(semantic web)이라 이해하는 것과 유사하게, 특히나 입력값을 처리하고 우선 순위를 설정하는 메커니즘 면에서 유사하게 꼼꼼히 묘사한다. 그는 컬러 코드로 시각화된 개개인의 의사가 사회적 공감대의 즉각적 표징을 제공하리라 상상하는데, 그것은 숀 스파이서(Sean Spicer)의 기자회견을 중계하는 페이스북 라이브 화면에 화난 표정의 이모티콘들이 떠다니는 광경과도 다르지 않다. 부활 사태를 논의하려 소집된 긴급회의에서, 중국 시민들은 당초 고립된 디지털 스토리지에 갇혀 있던 부활자들의 '인'권에 관하여 열띤 토론에 참여하고, 자국의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부활자들의 완전한 접속 권한을 부여하기로 의결하지만, 그곳에서 부활자들은 얼마 못가 심각한 혼란을 일으키고 만다. 알고 보니 문제아는 마오가 아니라, 정체가 더 모호하게 등장하는 다른 부활자들 중 하나였다. 그는 살아생전 장수를 누리는 동안 젊은 세대의 진보적 노선에 깊은 앙심을 품고 있었다. 새롭게 얻은 슈퍼파워로 깨어난 그는 자신의 충분히 자율적인 파생체들을 '맥충인(脉冲人)'이라 불리는 일종의 인류로 생성해냄으로써, 중국의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그 '바깥의' 정부를 전복시킬 보수 공화국을 수립해 보복에 나선다.

그러나 류츠신은 SF와 테크노오리엔탈리즘의 주류 레토릭에서 오랜 주요 요소였던 목적론적 악이나 기술적 악의 묘사를 삼가고 있다. 큰 손실을 감수하고 전국의 전력망을 차단함으로써 맥충인과 그들의 공화국을 강제 종료시킨 뒤, 젊은 최고집정관은 공화국이 자신들의 역사와 염원을 방대하게 문서화해 보낸 서한을 수령하게 되는데, 이로써 드러나는 것이란 그들의 종말에 있어 각별히 통절한 측면이다. 맥충인은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속도로 정보를 송수신하고 처리하기에, 그들은 두 시간이면 원숙한 국가 체제와 고유한 문명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시간은 인간적 시간에서의 대략 육백 년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중국 2185」는 하드 SF와 소프트 SF라는 해묵은 이분법을 거부해, 서로를 매개하며 사회적 담론을 구체화하는 행위자들로서의 과학과 이념에 관한 사변을 자유로이 전개한다. 중국의 근래 역사에서도 특히나 다난했던 시기에 쓰여진 이 소설에서 인간성과 민주주의, 국가주의에 대한 류츠신의 성찰은 낭만적이지만 그만큼 예리한 것이기도 하다. 의미심장하게도 그의 사변은 허구적이되 미래와도 다르지 않을 인프라의 기술적, 물질적 현실성에 기초하고 있다. 거대 규모의 데이터 처리에 수반되는 컴퓨팅 성능, 대뇌 구조의 사후 인코딩, 국가 ID 시스템과 그것이 민주적 의사 결정에서 시민들을 변별하는 방식, 인식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막중한 무게가 실리는 정보 경험, 그리고 래디컬하게 상이한 시간성들의 병존과 같은, 우리의 동시대적 일상과도 공명하는 많은 것들이 새로운 종류의 숭고를 위한 근간으로서 시적으로 탐구되는데, 인구 전체가 하나의 홀로그래피 성좌가 되어 인민대회당에 출석하고, SF 드라마 〈센스8 Sense8〉에서 볼 수 있는 것과도 비슷한 접속가능성(connectivity)의 형식들이 유발하는 강한 공감력은 소설 속 중국의 아이들을 대변하는 특징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은 권력의 추상적이거나 상징적인 재현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대신 중국의 관점에서 기술과 (그에 따라 필연적인) 문명의 미래에 대한 총체화된 사변을 제공한다. 얼마 전 『이플럭스 저널 e-flux journal』에서, 기술철학자 후이육(許煜)은 기술을 단순히 연구하는 데만 그치기보다 "기술이 문화를 뒷받침한다는 관점으로 전환1"해야 함을 역설했다.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 용어인 테크네(techne)를 호출해, 기술이 "끌어내 내어놓음(bringing forth), 즉 포이에시스(poiesis)에 속하는, 다시 말해 시적인(poietic) 어떤 것2"임을 상기시킨다. 기술은 그 탈은폐의 역량으로 존재론적 진실을 드러내 인간성이 스스로를 발견하는 상황을 열어보인다는 것이다. 기술의 영역에서 발생한 특이점 사건이란 필연적으로 심원한 파장이 따르는 인간성의 특이점 사건일 수밖에 없음을, 류츠신이 여러 소설에 걸쳐 시연해보인 것처럼 말이다.

「중국 2185」 같은 사변적 미래상들에 관해 인종 지향적 정체성 정치의 차원을 우선시하며 사고한다는 것은 해당 장르와 그 개념상의 지적 매력에 대한 모욕까지는 아닐지라도 하나의 저해 요인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 서구의 정치적 사고 핵심에 놓인 정체성 본위의 편향성은 그런 비판적 탐문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으로 시야를 좁힌다. 오늘날 반복해서 제기되는 질문이란 결국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저런 정체성 집단이 문화적, 정치적 지배 세력이라 여겨지는 미래를 어떻게 상상해볼 수 있을까?" 여기에 해당하는 사변이란 조직적인 저항의 노력을 강화하거나 보완해주곤 하지만, 버즈피드(BuzzFeed) 스타일의 이념적 소비주의와 학예적 화제성에 국한되고 거기에 휘둘리기도 쉽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문화에 특정적이고 지적으로 엄밀한 사변이며, 거기서 정체성 정치는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공각기동대 功殼機動隊〉에 대한 할리우드의 새로운 재연에 스칼렛 요한슨이 캐스팅된 것을 둘러싼 분노는 확실히 정당하다. 하지만 더 실효적인 전략이라면, 비판적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참조의 시야를 확장하고, 그럼으로써 실질적인 패러다임 변화의 추동력을 축적해 할리우드와 그 구태적 정치를 퇴물로 만드는 것 아닐까? 할리우드가 각색한 〈공각기동대〉는 일본의 고전에 표하는 하나의 지역적 오마주에 불과하며, 다문화주의의 모조품을 그 (저렴한) 액면가에 걸맞게 취하고 있을 뿐이다. 할리우드(아니면 미국이나 유럽, 또는 감히 말하자면 중국의, 가장 가시적이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제도권이)란 결코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거나 세계주의의 어떤 실질적 기준점이라는 사고, 그렇게 재현과 정체성에 관한 논의 저변에 계속해서 자리하는 가정이란 망상적이고 비생산적일 따름이다.



치우안숑의 〈신 산해경 3 新山海經三〉을 위한 스토리보드. 〈신 산해경 3〉은 유사 이전의 시각을 현대적 현상과 역경에 투영한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작가 제공 이미지.


주인공이 비-백인이라거나 에스페란토가 국제 공용어로 영어를 대체한다는, 또는 최고집정관과 함께 정부 소속 사이버 부대 구성원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 「중국 2185」 같은 이야기의 래디컬한 가정을 이해하기란 어리석은 일이다. 지나치게 특정적인 (서구의) 한 투쟁사를 수반한 담론으로서의 페미니즘은 다른 장소의 문화적 맥락에 유효한 판단과는 많은 경우 호환되지 않는다. 그런 한편, '타자화하는' 시선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들 뿐임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는다. 문화적, 지정학적 휘발이 쉬운 지역을 향한 드넓은 관측폭으로부터 거기서의 창조적 노력을 현시하고 재현한다 주장하는, 민망하고 비키니 왁싱된 전시가 기성 문화 기관에서 아직도 열리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러티브와 프레임을 더욱 탄탄히 통제하려는 노력은 지배적 담론 전반에 걸쳐 흔들리는 신뢰성과 약화되는 영향력에 대한 제도권의 불안을 반영한다.

「중국 2185」에서 가장 크게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향후 수십 년에 걸쳐 인류가 여러 방면의 최전선에서 겪게 될 윤리적, 법적, 생물학적이며 목적론적이기까지 한 매우 현실적인 도전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 미래상에는 인류가 기술로써 "보철물 달린 신"으로 변모한다는 프로이트의 예견으로부터 〈공각기동대〉에 이르는 오랜 역사가 있는데, 「중국 2185」의 경우 '맥충인'이 등장해 포스트휴먼이 인간으로부터 분기하는 임계점의 극명한 예시가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기술은 단순히 전통적으로 규정된 인간적 행위성을 증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실존적 역사의 질료라 할 시간 경험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젊은 여성 리더와 마오는 맥충인이 맞이한 재앙을 두고 의견을 교환하는데, 여기서 마오는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의 등가성을 논하며 맥충인의 불멸성을 바라보는 상당히 명쾌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적인 시각을 피력하고 있다.

"사는 것은 변하는 것이고, 영원히 사는 것은 영원히 변하는 것이라네. 백 년 내에서의 현상 세계가 불변하는 근본 원리의 집합을 중심으로 돌아갈지라도, 영원에서라면 그 원리도 변화에 구속되지. 사실, 영원까지는 필요하지도 않다네. 한때 근본적이라 여겨졌던 것이 완전히 변하기에 만 년이면 충분하고도 남거든. 그런 근본 원리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될 때, 남아 있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된다네. (...) 변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본질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일세.3"


치우안숑의 〈신 산해경 3〉을 위한 3D 렌더링. 작가 제공 이미지.


이처럼 시간을 불안정한, 또는 오히려 탈안정화된 하나의 행위자로 보는 것은 역사적 판단과 사변적 사고 모두에서 이미 더 광범위한 공감대의 일부가 되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와 더불어 동시대의 문화적 상상력이 발휘되는 또 다른 양상들(뮤직 비디오, 그리고 뮤직 비디오스러운 영상 예술)에서는 의사-원시사회나 종교적 상징체계와 관련한 필수요소(tropes)가 꾸준히 눈에 띄고, 작가 치우안숑(邱黯雄)은 〈매트릭스 The Matrix〉를 현상 세계에서의 불교적 체험이 SF적으로 표현된 영화로 간주한다.4 그런데 사실 우리가 종교적이지 않았던 적은 없다. 이는 단지 종교적 극단주의의 재래라든가, '캘리포니아 젠(禪)'으로 파급된 범영성주의나 마음챙김(mindfulness)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축구 경기장에서 갖가지 종교적 관습으로 공공연히 행해지는 기도와 열정적 헌신의 행동들, 그리고 밀교 종파의 영적 리더를 자칭하는 '인증된' 유저 무리가 '신통한' 염주와 함께 신심이나 기복을 위한 물건을 일상적으로 제안하는 웨이보에서의 인스턴트 구원 전자상거래 또한 여기서의 참조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때 인간의 습속과 세계 이해를 인도해주었던 종교적 사고는 지금도 여전히 미지와 우리의 연결을 매개하는 중요한 원천으로 남아 있다. 작가 루양(陸揚)은 신경과학을 단골 소재로 활용하면서, 인간이 새 변혁의 임계점으로 나아가는 와중에도 우상 만들기와 숭배가 오늘날의 공적 생활과 시각 문화, 그리고 신과의 진화하는 집단적이고도 개인적인 관계에서 어떻게 여전히 작동할 수 있는지를 재해석해본다. 최근의 프로젝트 〈망상적 범죄와 형벌 陸揚妄想罪與罰〉(2016)에서 그녀는 "나락, 즉 불교적 연옥으로 묘사되는 감각을 우리 자신의 생리적 체험과 경험적 지식으로 알 수 있는지5"를 묻는다. 그밖의 프로젝트에서 주목한 대상은 보철물로 된 광배(光背), 포스트-젠더 슈퍼히어로, 그리고 이제는 과학적 우주 이해의 근간을 이루는, 만물에 대한 사하스라(Sahasra) 우주론의 예지적인 성좌 모델이었다.

미술사학자 자이나브 바흐라니(Zainab Bahrani)의 논문 「실재 안의 재현 Representation in the Real6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바흐라니의 글은 상(像)이나 닮음과 결부된, 다만 영어의 'image'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강력한 의미를 지닌 아시로-바빌로니아어 개념 살무(salmu)에 대하여 치밀한 철학적, 기호학적 탐구를 선보이는데, 바흐라니가 미학적 개념보다는 존재론적 범주로 정의하는 그것은 "재생산을 통해 현존을 가능케 하는 형상7"이다. 그녀는 살무를 규정하는 요건을 최대한 포착해낼 수단으로, 이미지의 네 단계라는 보드리야르의 논의를 위시한 유럽 철학 정전의 재현 비판들에 의탁하고 있다. 이렇듯 지배적 철학 담론이 비판적 사고에 행사하는 강한 견인력은 기묘한 현상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자기 해체적 벌충 작용에 특화되어가지만, 동시에 비판적 사고에 강력한 힘을 발휘함으로써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자기 힘을 영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정전이 아무리 명쾌하고 겉보기에 믿음직스럽더라도, 우리는 바깥의 다른 무언가에 다가갈 때마저 매번 거기에 의탁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의 참조 영역을 충분히 확장했을 때에야, 즉 지적 담론에 있어 살무 같은 용어가 소쉬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될 언젠가라면, 우리는 비로소 서로 다른 세계가 아닌 여러 세계들을 동시에 살아가게 될런지도 모른다.


시아 아르마자니(Sian Armajani), 〈노스다코타 타워 North Dakata Tower〉, 1968. 이 작업은 노스다코타 주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는 기념비가 설치된 상황을 가정하는데, 작가의 계산상 이 기념비는 길이가 약 29km에 달한다. MAMCO 제네바 컬렉션, 작가 제공 이미지.


2. 비-타자 안의 불편함

2014년, 일년 내내 이어진 인터넷 탄생 25주년 축하연에 미술계도 끼어들면서, 초창기 넷 아트부터 '포스트인터넷'까지의 궤적에 따라 인터넷의 다면적 유산에 관한 방대하고 사려 깊은 성찰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월드 와이드 웹은 전혀 월드와이드하지 않았다는, 유럽과 북미 바깥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든 근본적인 사실을 자인하거나 탐구하는 일은 딱히 없었다. 늦게 입장한 그 게임이 불리하게 흘러간다고는 증명된 바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인데, 기술 진영에서도 오래 전부터 인정하다시피 거대 인터넷 문화에 늦게 다다른 국가일수록 더 영민하고 혁신적으로 적응하는 경향을 보인다.8 (그에 반해, 모더니즘 담론 전반에는 지금도 '뒤쳐짐'의 레토릭이 저항에 부딪혀가면서도 여전히 만연해 있다.) 지나치게 익숙하고 완고하며 이의 없는 가정들의 덤불 속에서, 웹의 불균질한 전지구적 분포만큼이나 본원적인 사실을 놓치게 된다면, 우리가 아직까지도 스스로를 발견하려 머무는 포스트모던과 포스트미디어와 포스트식민주의의 기나긴 순간 속에서 그 지적, 예술적 탐문이 직면한 못미더운 궤적을 헤아리는 수밖에 없다.

더 난감한 것은, 모더니즘에 종사하는 큐레이터와 학자들이 본인들의 주제를 언어 연구, 역사적 프레임워크 문제화, 다수적 시간성과 소유 형식의 도해를 통해 더욱 주도면밀하게 취급하게 된 데 비해, 동시대적인 주제, 특히 디지털 관련 주제를 다루는 다른 많은 지식인들은 상호 연결된 세계가 정말로 평평한 것이며 점점 더 평평해지고 있다는 경이로운 환영에 취해 움직이는 듯하다는 점이다. 사파리(safari)다운 리서치 여행에 몰두하며 자문가 및 번역가와의 네트워크를 유지하기만 하면 수렁과 같은 휘발성의 예술적 실천도 어쨌거나 포착해낼 수 있으리라는, 그런 경계해야 할 가정을 입증해주는 근거들이 지나치게 많다. 이국성 미개척지의 다음 주자를 찾아 헤매는 노력으로 인해 지구의 표면은 그 단어로 가능한 모든 의미에서 이미 소진되어버렸고, 우리는 그 필연적 귀결인 남극 비엔날레나 기다리는 처지로 전락했다. 자연히 관심은 사이버스페이스와 SF의 사변적 영역으로 옮겨 간다.

그러면서 상황은 더 까다로워진다. 다수의 모더니티가 있다는 것이 대체로나마 확립되었다시피, 포스트인터넷 조건에서 시간성은 그 기질상 훨씬 변덕스럽게 쌓여 있다. 즉각적 접근성과 동시성의 환영 배후에는 시간이 웹 전체에 걸쳐 상이하게, 또 래디컬하게 기능한다는 일차적 현실이 있다. 일례로 중국어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독보적 범위의 시간성을 나타낸다. 고대로부터의 관용어가 지금도 진지하게든 풍자적으로든 널리 활용되는 동시에, 새로운 기호의 공간과 화제 특정적 화법이 자극적인 속도로, 디지털 서브컬처와 약삭빠른 검열 회피 전략에서 특히 현저하게 생겨난다. 한국어, 일본어, 그리고 영어로 된 용어가 겨우 몇 시간 짜리 생애 주기로 변이를 일으키며 번역 없이 신속하고 실용적으로 차용, 흡수되어 광범위한 순환에 편입된다. 인터넷에서의 담화에 작용하는 외생적 영향으로서 언어적 구조가 보여주는 결정적 중요성은, 포스트인터넷 담론을 주도하는 아무리 철두철미한 누군가일지라도 주류 서구 언어로 매개된 사이버스페이스가 아닌 이상 어째서 그 어느 곳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지를 설명해준다. 온라인 영상을 부유하며 동시다발적으로 누적되는 코멘트들을 떠올려보자. 이 '탄막(彈幕)'으로 언어와 구문(syntax)의 실시간 생산이 가능해진다. 상대성 원리에 따라 극히 빠른 속도에서 발생한다는, 영화 〈인터스텔라 Interstellar〉에서도 등장하듯 대중적 SF의 필수요소이기도 한 시공간 왜곡은 언어적, 문화적으로 상이하게 특정적인 사이버스페이스 경험의 비유로 그렇게 억지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 포스트인터넷 조건은 상대성과 분화를 가속할 뿐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언어적 조건이다. 비단 언어의 뜻만이 아니라, 무엇이 순환하는지, 그리고 특정한 순환의 형태가 시각적 재료(특히 인터넷 유행으로서의 성격이 뚜럿하지 않은 것들)의 몫도 포함해 의미를 어떻게 매개하는지에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번역의 실효성은 시간과 기호에 관련된 새로운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문화적 산물을 처리함에 있어 전례 없이 약화된다. 이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다. 해석적 국면마다 의미론적 파열이 담보된다. 해당 언어를 구사하더라도 불충분하다. 관객으로라도 유의미하게 합세하려면 밈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Boaty McBoatface의 영어성(언어적 의미에서의 영어)과 영국성(문화적, 이념적 의미에서의 영국)이 유의미하게 번역될 리는 없다.9 밈이 문화적, 정치적, 언어적으로 더 특정적일 때, 말의 유창함은 포괄적 이해를 보장하지 못한다. 그 얽히고설킨 특정성의 집합은 포스트식민주의적 사고와 미국의 인종 역학으로 허다하게 환원되어온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재현 정치를 발생시키는 중이다. 지배적인 '포스트인터넷'의 레토릭으로 소화하기 편한 지역적 징후를 발견하려는 학술적이고 학예적인 노력은 대개 선입관대로의 볼거리에 불과한 것을 확인하며 끝나기 마련이다. 당연하게도 누구든 중국의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해 그곳의 언어를 구사하지 않으면서 이해를 시도할 수야 있겠지만, 그 암흑의 핵심은커녕 개성(quirks)과 결함(glitches)을 헤아리기조차도 거의 불가능하리라.

번역에 대한 책무란 음험한 것이다. '타자'는 목소리를 얻지만, 그저 계속해서 설명하고, 자격과 납득을 구할 뿐이다. 유럽-미국의 인식론적 안락지대 바깥에서 대담하게 사변적이고 다원적인 예술적 실천이 작동하더라도, 그것이 요구하는 진정한 대화에 필수적인 공간을 맥락 해명의 촘촘한 해석학들이 과점하고 있다. 더 기만적인 것은 한입 크기의 자기 설명적 메커니즘을 내장하고 스스로를 이국화하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확산되어간다는 점이다. 동시대 중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많은 사람들은 (중국 식민적 유산은 물론) 내면화된 식민적 역사를 가져본 적 없는 문화적 실체에 던져지는, 가르치려 들고, 의도는 좋으며, 소위 말하는 자기 비판적인 것일 포스트식민주의적 시선의 부조리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 그 시선은 예술적, 학예적 실천을 끌어들이는데, 그 실천들은 매우 실질적인 자기 결정권에도 불구하고 가짜 지적 공감대의 유혹적 매력에 의식적이든 아니든 영합하며 구독을 누른다. 국제 학예연구 회로는 그렇게 잰체하는 도덕적 자기 과시에 잠식당했다. 지식과 미학적 생산의 새로운 형태에 내재된 실험적 역량은, 그 주제의 불편한 효력을 외면하는 피상적 참여에 수여될 그럴싸한 보상을 통해 사전에 망가져버리거나 압류되고 만다.10

작가 밍 웡(黃漢明)은 비디오 설치와 퍼포먼스를 아우르는 자신의 프로젝트에서 여성 우주비행사라는 인물상을 구현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남성 인물상은 지나치게 명백해요 (...) 여성 우주비행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바램을 투사할 수 있는 여지가 되죠."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자면 더 헷갈리는 것은 이 프로젝트에 동반되는, 사변적 원전에서 발굴된 여성(이 대다수인) 우주비행사들을 모아둔 리서치 기반 패스티시다. 여기서의 다채로운 캐릭터들 특유의 행위성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들 중 몇몇은 사랑스러운 투사 맞춤형 메타 필수요소라기보다, 차라리 『삼체 3부작』 같은 SF 고전이 능수능란하게 보여주는 구원자 겸 소시오패스에 가깝다. 그 복잡다단한 캐릭터성은 마오주의 페미니즘의 확연한, 확연히 문제적인 흔적에 이념적으로 맞물리도록 숙고를 거쳐 발현된 것으로, 그저 정체성 수행이나 콜라주 환상곡이라는 트렌디한 형식으로서가 아닌, 더 탁월한 반영성을 갖는 무엇으로서 다루어져야 한다.11 초호화 작가진을 자랑하는 앤 리(Ann Lee) 프랜차이즈는 일본 에이전시에게서 사용권을 가져온, 그리고 늘상 그렇듯 보라색 머리의 아시안 걸인 만화 캐릭터에 대한 협업적 명상으로, 이 캐릭터가 유통되는 본래 맥락에서의 문화적 논리에 대한 황홀한 무자각을 전시한다. 휘트니 미술관에서의 전시 《꿈나라 Dreamlands》로 후하게 노출될 수 있었던 앤 리 프로젝트는 저작권과 소유권, 그리고 저자성을 막연하게 주고받는 만화나 여타 팬덤의 세계와는 정반대로 절대적 소유권을 분할하고 분배하는 것이다. 티노 세갈(Tino Sehgal)의 재연에서는 앤 리를 '소생'시키려 젊은 여성 배우들을 기용했다. 이들이 낭독하는 대본으로 세갈은 자신의 저자성을 내세우는데, 어찌 보면 이런 부류의 개인 브랜딩과의 대척점에서 정의되는 디지털 문화와 서브컬처에 맞서, 소유권을 향한 시대착오적 욕망을 노출하는 셈이다.

포스트인터넷 조건은 예술과 그 매체로 진행되는 자기 반영성 게임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그 자기성찰의 형태에서 예술가들은 더 이상 독점적일 수 없고 게다가 우월하지도 못한데, 지극히 탁월한 TV 드라마나 비디오 게임, 그리고 밈에게마저 추월당하고 있다. 이 일식은 리서치 기반 예술 창작의 다른 친숙한 전략에까지도 미친다. 가령 비디오 게임 〈바이오하자드 6 Resident Evil 6〉에서의 예를 들자면,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태인 홍콩의 한 드래곤 보트에서는 완전히 쓸모없는 통로를 만나게 되는데, 스토리 전개와도 무관하고 습득할 아이템도 없이 순수한 세계-구축하기(world-building)로서 만들어진 곳이다. 그 끝으로 가보면, 꽃이 만발한 나무 아래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마오를 공들여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다. 철저히 사소한 꾸밈 요소 하나로 풍길 이념적 뉘앙스에 대한 맥락적 자각과 세심함의 레벨은 기이하고 낯선 것으로, 게임 제작자의 비판적 역능을 반영하고 있다.

IS(The Islamic State)의 소셜 미디어 활용은 인터넷이 인식론적 균열과 오정렬을 노출하는 또 하나의 현상이다. IS는 교활한 프로파간다에 소셜 미디어를 동원해 그들의 세계 유산 파괴 행위를 선전하면서, 역사적으로 이슬람은 우상 혐오적이라는 서구의 인습적 오해를 역이용한 자기 본질화를 통해 스스로의 정통성을 이중으로 강화한다. 미술사학자 핀배어 배리 플러드(Finbarr Barry Flood)는 이 현상을 이슬람 미술의 '이미지 문제'에 대한 역사적 담론 내의 사안으로 재맥락화함으로써 그 정치적, 이념적 뉘앙스를 설득력 있게 진단했다.12 그는 외미르 하르만샤(Ömür Harmanşhah)의 다음과 같은 충고를 인용한다. "우리가 페이스북 프로필, 트윗, 블로그에서 폭력의 문서화로 취급하는 것이 실은 IS 생명정치의 존재 근거일 가능성을, 반드시 책임감을 갖고 고려해야 한다.13"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IS의 바이럴 프로파간다는 피상적으로 적대적이고 선정적인 파괴의 이미지로 생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새로운 기술적 시간성을 통해 재보정된 하나의 심층적 역사를 참조 대상으로 두고 있다.


모레신 알라야리(Moreshin Allahyari), 〈물질적 사변: ISIS Material Speculation: ISIS〉, 2015. 3D 프린팅과 플래시 드라이브로 제작된 라마수(Lamasu)상으로, 이 측면 디테일은 3D 프린트된 오브제 내부의 플래시 드라이브와 메모리 카드로 시선을 유도한다.


낯선 시대와 시간성을 이야기하는 김에 언급해보자면, 후기 자본주의와 소프트 파워 전쟁은 〈그레이트 월 The Great Wall〉(2016) 같은 영화가 출현할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 아닐까 한다. 중-미 양국에서의 대규모 개봉을 염두한 중국산 블록버스터로서, 이 영화에서는 맷 데이먼이 고대 중국의 용병으로 분하는데, 이 용병은 '장벽'을 돌파하려는 흉폭한 짐승들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데 두드러진 역할로 활약하게 된다. 그 문화적 둔감성 탓에 국제적 혹평에 시달리긴 했지만, 이 영화는 할리우드 자신의 뒤틀리고 위선적인 정체성 정치를 향해 아이러니한 거울을 비추고 있다. 마찬가지로 문제적인 타자성의 정치와 함께하는 미술계는 새로운 예술 담론을 위한 진정한 가능성을 배양하기보다 새로운 예술 산업의 도래를 축하하는 데 더 몰두하는 듯 보인다. 사전 프레이밍과 사후 번역의 권력으로 주어진 안락한 위치에서, 가르치며 들며 '타자화하는' 시선이 작동하는 한, 그것이 자신의 문제적 위치를 아무리 유념한다 해도(그렇게 보일 뿐일 수도 있겠지만), 푸코가 말하는 "래디컬하게 타자인" 것, 즉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란 언제까지고 묘연하게, 있는 그대로인 광경에서도 인지되지 못한 채, 오히려 압류된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14


루양, 〈망상적 만다라-크리스털 妄想曼荼罗-水晶〉, 2015. 작가 제공 이미지.


3. A-퓨처리즘

던 챈(Dawn Chan)이 아시안 퓨처리즘에 대하여 『아트포럼 Artforum』 2016년 여름호에 기고한 글은 "시간을 초월해 타자일 수 있는가?15"라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된다. 타자성이란 관념은 지리적 내러티브에 달려 있다는 일반적 인식과 대조적으로, 챈은 시간적 흐름에 따른 타자성의 담론적이고 역학적인 긴장에 관심을 기울이며 아시아계 미국인의 경험과 문화적 전유, 그리고 재현과 그 재현 속 결여에서의 명부를 찾아나간다. 그러나 타자성이 필연적으로 결핍으로 인한 여지에서 작동한다는 거기서의 함의에 수긍하기에는 위험이 따르는데, 실제로는 래디컬하게 이질적인 무언가에 대한 본질화의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데이빗 S. 노(David S. Roh), 벳시 황(Betsy Huang), 그리고 그레타 A. 니우(Greta A. Niu)는 "테크노-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문집을 조명하는 서문 성격의 글에서, 그런 타자성에 대한 본질화를 기술적으로 진보된/지배적인 아시아와 그것을 동경하면서도 위협으로 바라본 서구의 불편하고 지속적인 조우의 산물이라 진단했다.16 그들이 관찰하기에 테크노오리엔탈리즘은 SF를 통해 영속되어왔고, 이는 당대의 인종주의적, 제국주의적 태도를 투사해 증폭시키는 SF의 장르적 경향성 때문이다. 그들은 "역사 서술, 영화, 뉴미디어의 내용에 SF와 그 변종들이 테크노오리엔탈리즘적 표현을 제공한다면, 그에 대한 문서화 및 심문을 위해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로 최선의 이론적 도구 상자를 갖출 수 있으리라17"고 주장하는데, 그런 접근 방식은 아시아계 주체가 문제적으로 재현된 SF 관련 자료를 심문하기에는 생산적일 것이다. (투쟁의 역사에는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거기서 다뤄지는 자료들에 과분한 주목을 선사하면서 사변적 예술과 문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무심코 재현적 정체성 정치의 협소한 영역에 국한시킬 위험을 무릅쓰는 접근 방식이기도 하며, 이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행위성 대 아시아인의 행위성, 또는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학예적 이해에 있어 끊이지 않는 혼선에 일조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열적 레토릭이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며,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특정성에 대한 엄밀한 접근을 촉구하는 것임을 일러두고자 한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논문 「수행적 행위와 젠더 구성체 Performative Acts and Gender Constitution」에서 경고를 담아 주장한 바를 다음과 같이 다시 써본다. 연대의 결속을 가공해내려는 이해 가능한 욕망으로, 우리는 흔히 '타자'에 보편적 경험이 있다거나 그 자체가 보편적 경험임을 상정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연대를 위해서라면 문제가 있는 존재론적 기반이다.18

이 글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깨끗한 담론들을 더럽히고, 특정한 동질적 방법론의 기구들(apparatuses)을 동요시키기를 겨냥한다. 그 목적은 한층 더 흥미로운 혼돈에 있다. 여전히 새롭고 미정의된 담론인 아시안 퓨처리즘이 테크노오리엔탈리즘에 그 계통상의 이념적 뿌리를 두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시간적으로나 지역적으로만 정의된 채 남는다거나 하나의 고착되고 이의 없는 비평 시스템에 얽매인다면 궁극적으로는 이로울 것이 없다. 대신 아시안 퓨처리즘은 인간중심적으로든 다른 방식으로든 래디컬한 사변적 상상을 앞과 뒤로 촉진할 다양한 탐문의 경로를 유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정치적 행동을 위한 새로운 도구를 빚어낼 수도 있겠지만, '낯설고 새로운 지혜'를 빚어내는 것 아닌 그 어떤 공리적 목적에도 봉사할 필요는 없다.19


1 Geert Lovink and Yuk Hui, "Digital Objects and Metadata Schemes," e-flux journal 78 (December 2016)
2 As cited in Julia Vaingurt, Wonderlands of the Avant-Garde: Technology and the Arts in Russia of the 1920s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13), 12.
3 Liu Cixin, China 2185, written in 1989 and never published in print. It now circulates online and can be accessed on sites such as http://www.kanunu8.com/book3/6655/
4 Xin Wang, "Wind Rising from the Tips of Green Duckweeds: A Conversation with Qiu Anxiong," Temporal Turn: Art and Speculation in Contemporary Asia (Kansas: Spencer Museum of Art), 159.
5 Interview with the artist in Feburary 2016.
6 Available in Zainab Bahrani, The Graven Images: Representation in Babylonia and Assyria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03), 121–48.
7 Ibid., 131.
8 See the Jonah M. Kessel and Paul Mozur, "How China is Changing Your Internet," video, New York Times, August 9, 2016.
9 See Katie Rogers, "Boaty McBoatface: What You Get When You Let the Internet Decide," New York Times, March 21, 2016.
10 See Siegfried Kracauer, as cited in "Techniques of the Observer: Hito Steyerl and Laura Poitras in Conversation," Artforum, May 2015.
11 See Ran Dian editors, "'We all just need to relax'—sound bites from ACAW," Ran Dian, November 2 2015.
12 Finbarr Barry Flood, "Idol Breaking as Image Making in the 'Islamic State,'" Religion and Society: Advances in Research 7 (2016): 116–38.
13 Ömür Harmanşhah, "ISIS, Heritage, and the Spectacles of Destruction in the Global Media," Near Eastern Archaeology, vol. 78, no. 3 (2015): 170–77.
14 Michel Foucault, Remarks On Marx (New York: Semiotext(e), 1991), 121.
15 Dawn Chan, "Asia-futurism," Artforum, Summer 2016.
16 David S. Roh, Betsy Huang, and Greta A. Niu, "Techno-Orientalism: An Introduction," Techno-Orientalism: Imagining Asia in Speculative Fiction, History, and Media (New Brunswick: Rutgers University Press, 2015), 1–19.
17 Ibid., 10.
18 Judith Butler, "Performative Acts and Gender Constitution: An Essay in Phenomenology and Feminist Theory," Theatre Journal, vol. 40, no. 4. (December 1988): 530.
19 Cao Fei/China Tracy, "RMB City Manifesto," reprinted in Cao Fei: I Watch That Worlds Pass by, ed. Renate Wiehager (Köln: Snoeck, 2015), 199.

e-flux.com/journal/81/126662/asian-futurism-and-the-non-other